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 이씨 (문단 편집) == 기원 == 시조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말기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신라)|이한]](李翰)이다. '재미있는 성씨 이야기'라는 출처에 의하면 이한의 조상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설[* 연대, 작자 미상의 '완산실록'이라는 출처불명의 책에서 '중국 기원설'이 등장하는데,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인해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고 족보에 기재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과 [[신라]]의 토착 성씨인 [[경주 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는 설[* 실제로 경주이씨 대종보를 보면, 시조 이알평에서 중시조인 소판공 이거명 사이의 실전 세계를 부록으로 수록하면서 중간에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실전 세계는 경주 이씨에서 분적한 [[합천 이씨]]의 조선 말기에 발견된 족보를 근거로 한 것이다. 다만, 경주이씨 대종회에서는 실전세계에 대해 조선 말기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36대에 이르는 경주 이씨 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무더기로 발견된 점,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 말기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뢰하지 않고 있다. 항렬자를 근거로 한 반론의 내용은 세대와 세대 사이를 구분하는 항렬자와 달리 형제 사이의 돌림자(중국으로부터 성씨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성씨와 유사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도 추정)는 최소한 고려 초부터는 나타나고 있어서 적절하지 않지만, 고대 계통 36대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한국사에서의 [[족보]] 제작이 대체로 조선 [[성종(조선)|성종]] 연간 즈음인 1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점과 웬만한 집안은 여말선초 이전의 세계는 정확하게 상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혹의 여지가 있다.]등이 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완산(完山)[* 전주(全州)]은 선원(璿源)이 시작한 곳이라...'' -《태종실록》 태종 12년 8월 20일 임신(壬申) 1번째 기사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건대, 본디 나온 곳은 경주 이씨이다.''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6001|[* 모바일 기준으로 링크 좌측 한글 본문 5문단 21번째 줄. 우측 한문 본문에서는 59번째 줄에 謹按璿源所自, 卽慶州 李氏]]] >"삼가 선원의 기원을 살펴보건대, 전주의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서, 사공 휘 이한은 신라에 벼슬하여...''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9월 18일 경신 2번째 기사 >"신의 22대 조상 이한에 이르러 신라에 벼슬하여 사공이 되었으며...''-《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19일 기축 1번째 기사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李翰)이 신라에서 사공(司空) 벼슬을, 이한의 손자인 이천상이 신라에서 복야(僕射)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공#司空]]은 원래 중국사의 명예직이고, [[복야]]라는 관직은 신라 진성여왕 시기에 최초로 도입되었다고도 하는데, 진성여왕 시기는 통일신라가 끝날 무렵이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신라에서 복야 벼슬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신라는 삼국시대 신라가 아닌 통일신라'''를 말한다. 다만 고대의 기록에서 심지어 고려 때까지도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하는 시기보다 실제 바뀐 제도에 따라 관직이 임명되는 시기가 매우 늦는 경우가 보통이라 사공이나 복야에 실제로 임명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호족들의 성씨가 고려 초 ''''토성분정''''과 이후 ''''봉미제도''''로부터 생겼음을 감안하면, 성씨 제도를 시작한 중국에서 시조가 높은 벼슬을 하다가 왔다거나 통일신라, 고려 초기에 높은 벼슬을 하였다며 가문의 연원을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에 해당할 수도 있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토성(土姓)이라는 것은 그 지역에 뿌리 내린 성씨라는 의미일 뿐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에 나오는 경주이씨 기원 기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경주시|경주]]를 본관으로 하며 기원이 [[신라]]까지 소급되는 9성[* 신라의 왕성^^王姓^^인 [[박씨]], [[석(성씨)#昔 (옛날 석)|석씨]], [[김씨]]와 [[서라벌]]의 6촌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성씨)#薛 (맑은대쑥 설)|설씨]]]은 다른 성씨보다 일찍 발생한 성씨였으므로 [[사성정책]]이나 이주를 제외한 모든 이씨의 출처를 일괄적으로 경주 이씨로 소급하여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어서 분명하지는 않다. 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도 이씨(李氏) 성(姓)일 정도로 당대 유행하던 성씨이니 그래서 도입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이는 전주 이씨뿐만 아니라 동성이본(同姓異本)인 성씨들의 공통적인 화제인데, 전주 이씨가 조선 왕가의 성씨이다 보니 독자적인 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 문제가 유달리 부각된다. 단순히 신라에서 벼슬한 이씨라는 점 때문에 신라 김씨가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 이씨가 경주 이씨를 중심으로 분화했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적용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조선 왕가의 선원 계보가 가문 바깥의 시선에서 봤을 때 경주 이씨와 연결될 여지가 있었다는 것 뿐이다. 어차피 아래의 인천 이씨 관계설에서 보듯 이광희(李光禧) 이전의 선계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설에 불과하다. '''전주 이씨와 [[인천 이씨]]의 관계'''에 대해서도 특이한 부분이 있다.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 이자연, 이천상'''과 인천 이씨의 '''이한, 이자연, 이자상'''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이름과 한자의 차이점과 이자연의 아들 이천상, 이자연의 형제 이자상으로 관계가 다른 점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만약 이들이 서로 동일인이라면, 인천 이씨 시조의 허씨 분적설이 정설이다 보니 인천 이씨와 경주 이씨와의 관계가 설명돼야 할 것이다. 다만, 전주 이씨 이한, 이자연, 이천상은 조선 왕조가 일어나면서 추가된 부분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전에 쓰여진 '이자춘 신도비(李子春 神道碑)'에 기록된 이성계 가문의 내력에는 전주 이씨 시조로 이광희(李光禧)가 나온다. 즉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광희 위로 이한, 이자연, 이천상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전주 이씨가 왕가(王家)로 일어서자 가문의 격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 고려에서 최고 명문가로 손꼽히던 [[인천 이씨]]로부터 가져온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다. [[이자겸의 난]]을 일으킨 [[인천 이씨]] [[이자겸]]의 작위가 '''한양공(漢陽公)'''에 '''조선국공(朝鮮國公)'''이었으니 실로 기이한 일로 이와 관련해 조선과 한양이 인천 이씨의 나라와 도읍이 되려다가[* 실제 고려 인종은 이자겸에게 선위하겠다고 하였으나 당황한 이자겸이 감히 받지 못했다.] 그 운을 받지 못하자 전주 이씨의 나라와 도읍이 되었다는 도시전설도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실 계보를 정리하면서 시조인 이한이 [[신라]]의 [[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했다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총서와 왕실 족보인 《선원록》의 내용이다. 이는 모계를 태종 무열왕의 계보와 연결함으로써 단일국가의 정통성, 즉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고려]]를 이어서 [[전주 이씨]]가 세운 조선이 통일삼한을 잇는다는 상징적 의미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의 종묘에 고려 [[공민왕]]의 신위가 모셔진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고려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지만, 조선 왕조에서 고려 왕조의 마지막 적통은 [[공민왕]]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이한의 묘가 있다는 전주 건지산(乾止山) 일대를 샅샅이 뒤졌을 만큼 이한(李翰)은 실존했던 인물로도 볼 수 있으므로 당연히 실제 혼인했을 수도 있다.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일으켜 [[고려]]를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권문세족들이 숙청당했지만, 대부분의 고려 귀족은 조선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 이들 양반의 수는 소수였고, 17세기 광해군이 공명첩을 시행하면서 급격하게 성씨를 쓰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는데, 돈을 주고 벼슬을 사는 매관매직이 늘어난 탓이었다. 물론 이는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했다. 임진왜란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세수가 필요했고, 신분제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명첩을 시행한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보르게시아(borghesia, 부르주아bourgeois)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족, 귀족에 이어 제3계급의 신분(Terza steto)으로 불리우며 급부상하는데, 유럽에서도 이들 '부르주아'들이 신분상승을 위해 매관매직으로 귀족의 작위를 사기 시작하면서 신분제가 급격히 흔들린다.] 조선 말기인 1894년(고종 31년)에는 [[갑오개혁]]의 실시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모든 국가 제도가 근대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양반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고, 매관매직, 족보를 사고 파는 행위는 더욱 늘게 된다. 1909년 4월 1일 일제가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을 시행하면서, 상당수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갖게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들어서면서 족보를 세탁하다 간혹 다른 집안끼리 1대 조상(시조)이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있었는데, 이럴 땐 애초 다른 집안끼리라도 족보를 아예 합쳐버려 같은 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웃지 못할 합본 행위도 성행하였다.[* 예로 들면, 육종영(六宗英)의 한사람이었던 [[하령군|하령군 이양]]의 손자인 이계조와 이소조는 [[광산 이씨]] 중시조의 7세손으로, 지봉유설의 저자인 이수광(경녕군의 5대손)은 《김포 이씨 족보》에, [[수춘군]]의 현손인 이세호는 《충주 이씨 족보》에, [[덕천군]]의 5대손인 시흥군(始興君) 이정은 [[경주 이씨]] 국당공파 12세손(중시조로부터 28세손)으로 나온다. 이들 경우에는 합본이라고 말할 수 없어도 《전주 이씨 족보》와 다른 이씨 족보를 대조해서 보면 직책이 서로 겹치는 경우가 있다.] 당연하지만 모든 전주 이씨가 이안사부터 시작되는 왕의 자손인 것은 아니다. 이른바 '선계'라 하여 이안사 이전에 갈라진 계파들이 존재하며 이들 중 상당수는 이안사와 달리 전주 지역에 남아있었다. 전주 한옥마을 인근의 오목대는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가 전주에 살고 있던 전주이씨 친척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인 곳이라는 전승이 남아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면서 상당수 전주 이씨들이 한양으로 옮겨와 정착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